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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_개봉 20주년 기념 정보

     

    '태극기 휘날리며'는 2004년 작으로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극본, 감독을 맡은 영화이다. 장동건과 원빈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진태와 이진석을 맡았고, 이은주가 진태의 약혼녀 영신역으로 출연하였다.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 발발)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로 쉬리, 친구,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와 함께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시발점에 해당하는 영화이며, 실미도에 이은 두번째 천만 관객 돌파 영화이기도 하다.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아 4K 리마스터링 영화가 개봉하였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가족의 생계만으로도 벅찬 형에게 비극이 닥친다. 이제 형에게는 가족의 생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긴다. 갑작스럽게 전쟁터에 내몰린 형제. 이제 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동생을 지키는 것이다. 형에게는 더이상 이데올로기나 정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감독은 관찰자로 동생 진석의 시점을 택함으로써 논쟁을 비켜간다. 18살 소년의 눈에 비친 전쟁은 이유없는 살육과 적의로 가득차 있다. 북한과 남한, 양쪽의 양민학살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어느 쪽도 완전한 선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분단 국가의 국민인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면서 분단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무관심처럼 감독은 당시의 정치 상황, 계급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강제규 감독이 원하는 것은 '감동'이 아닐까. 거기에 당시 한국 영화로서는 유례없던 거대 제작비를 투자한 전투 장면은 헐리우드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연상시킬 만큼 사실적이고 끔찍하게 잘 묘사했다. 이러한 점들이 모여 감독의 강제규식 진보성과 감동을 선사했고, 관객들에게 적중한 것이다. 

     

     

    줄거리

     

    영화는 한국 전쟁 격전지 중 한곳인 두밀령 일대에서의 유해 발굴 작업으로 시작한다. 이진석이라는 이름의 유품이 발견되어 조회해 보니 생존자이다. 진석은 50년 전을 회상한다. 1950년 6월, 당시 18살 고등학생이었던 진석은 서울대를 꿈꾸는 우등생이다. 형은 그런 동생을 자랑스러워하며 구두닦이를 하면서 뒷바라지에 열심이다. 갑자기 전쟁이 터지고 형제는 징집되어 전쟁터에 내몰리게 된다. 그렇게 가족과 약혼녀와 생이별을 한 형제...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고 심장병을 앓고 있는 동생을 위해 형은 공을 세워 동생을 전역시키고자 결심한다. 그렇게 누구보다도 열심히 작전에 투입하고 공을 세우며 전쟁광이 되어 가는 형을 보며 동생은 형에 대한 원망감만 키워간다. 형은 드디어 공을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받지만, 보도연맹 가입을 근거로 약혼녀 영신이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동생은 빨갱이로 의심받아 감금된다. 약혼녀의 죽음과 동생의 상황(죽은 줄 알고 오해함)에 형은 정신이 나가버리고 중공군에 끌려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상처를 치료하고 의병제대를 앞둔 진석. 형이 북한군 붉은 깃발부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진석은 탈영을 감행하고 북한군 진지로 향한다. 마침 미군의 공습으로 북한군 참호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형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다. 다행이 곧 동생을 알아보고 동생이 안전히 후퇴하는 걸 돕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 인민군 쪽을 사격하여 퇴로를 확보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50년이 지나서 유골의 모습으로 동생 진석과 재회를 한다. 노인이 된 진석은 형의 유품인 만년필을 보고 발굴된 유해가 형인 걸 알고 오열한다. 

    역사적 배경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다. 1945년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1,129일)간 전투가 이어졌다. 극동아시아의 미소 냉전 사이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가 있어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6·25 전쟁은 전후의 시작을 대표하는 사건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공산 정권이 대체로 우세했고 거의 통일도 이룩한 국공내전, 베트남 전쟁과 달리 양측이 한 번씩 승리에 다가섰다가 균등해진 상태에서 정전을 이룬 다소 극적인 전개를 거쳤으며 각각 통일에 실패한 대한민국과 북한은 이후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걸고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 운영과 국민 여론 및 의식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 남북이 아직도 갈라져 있는 상태이다. 6·25 전쟁의 평화협정(종전 및 강화 조약)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으며, 통일이 아직도 안됐기 때문에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지만, 현재 남북 양측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중이라는 인식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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